며칠 전까지만 해도 살을 에일 듯 차가운 바람이 도시를 가로질렀다. 사람들의 입김은 하얀 구름이 되어 퍼져 나갔다. 그러다 오늘은 조금 느슨해진 기온 덕에 두꺼운 외투를 잠깐 벗어두기도 했다. 마치 겨울이 잠깐 숨을 돌리는 듯한 하루였다.
내일 다시 매서운 추위가 찾아온다고 한다. 이제 곧 겨울이 제자리로 돌아갈 것이다. 하늘은 다시 회색빛으로 물들고, 나뭇가지 끝에서 맺힌 고드름은 제법 위협적인 날을 세울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나는 이런 계절이 조금은 반갑다. 겨울은 겨울다울 때 가장 겨울답기 때문이다. 여름에 찾아왔던 그 지독한 더위를 생각하면, 오히려 추위가 반갑기까지 하다. 차가운 공기 속에서 속 시원함을 느낀다.
지난 여름은 유난히도 길고 고통스러웠다. 햇빛은 도시를 뒤덮은 회색빛 콘크리트에 마구 내리꽂혔다. 나무 그늘을 찾아 발걸음을 옮겨도 이미 뜨겁게 달궈진 공기는 나를 따라붙었다. 뉴스에서는 연일 역대 최고 기온을 기록했다고 호들갑을 떨었다. 폭염이라는 단어는 더 이상 뉴스 속 단어가 아니었다. 그것은 현실이었고, 우리의 숨통을 죄어오는 지구온난화의 경고였다.
11월이 지나도 겨울이 온줄 몰랐는데 그래도 12월에 들어서자 겨울은 제 할 일을 한다. 날이 추워지면, 겨울은 스스로를 증명하듯 땅과 공기를 얼어붙게 만든다. 따뜻한 겨울은 어딘가 기분이 이상하다. 12월이 되었는데도 따뜻하다면 그건 분명 불안한 신호다. 겨울이 제 할 일을 하지 않는다면, 봄과 여름이 감당해야 할 무게는 더 커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일까. 때로는 매서운 추위가 오히려 안심을 준다. 겨울은 겨울다워야 하지 않겠나? 계절이 제 역할을 다하고 있다는 그 안도감. 모든 것이 제자리를 지킨다는 것은 얼마나 소중한 일인가. 물론 사람들은 춥다고 투덜대겠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이 겨울을 겨울답게 누릴 필요가 있다.
겨울이 되면 나의 하루도 조금 달라진다. 여름에는 그저 숨만 쉬어도 덥고 지쳐서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는데, 겨울은 묘하게 나를 움직이게 만든다. 두툼한 목도리를 두르고, 장갑을 낀 채로 카페에서 얼죽아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이 그렇게 좋을 수 없다. 겨울에 마시는 커피는 맛이 다르다. 한 여름 마시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는 시원함이지만 한 겨울 아이스 아메리카노는 정신이 번쩍 든다.
거리를 걷다 보면 어느새 손이 시려워 호호 불며 가게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러다 우연히 들른 작은 빵집에서 갓 구운 식빵 냄새를 맡는다. 그 순간 내 마음을 흔드는 것은 바로 그 따뜻함이다. 겨울의 냄새, 겨울의 온기. 마치 긴 하루에 찍힌 작은 쉼표 같다.
창밖을 보면 앙상한 나무들이 겨울을 버티고 서 있다. 나뭇잎 하나 남지 않았지만, 그마저도 아름답다. 나무는 겨울을 피하지 않는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한 계절을 묵묵히 버티는 그 모습은 어떤 위로처럼 다가온다. 나도 그렇게 나의 겨울을 받아들이고 싶다. 이 계절이 나에게 주는 작은 선물들을 찾아내며 말이다.
겨울의 작은 행복은 찾으려 들면 어렵지 않게 발견된다. 차가운 바람이 코끝을 스칠 때 느껴지는 상쾌함, 집으로 돌아와 보일러를 켜고 따뜻한 이불 속으로 들어갔을 때의 안도감, 그리고 뜨끈한 국물 한 숟가락이 주는 위로 같은 것들 말이다.
날씨가 영하로 내려가던 어느 날, 버스를 기다리며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는데, 마침 내가 타려던 버스가 멈췄다. 그 안은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공간처럼 느껴졌다. 버스 창가에 앉아 하얗게 흐려진 창문 너머로 세상을 보았다. 창문에는 습기가 가득했고, 손가락으로 장난스레 이름을 적었다가 지웠다. 어린 시절에도 이런 적이 있었는데. 그 순간 나는 잠시 어른이기를 멈췄다. 추억은 늘 사소한 순간에 찾아온다.
집으로 가는 길 그냥 집에 들어가기 아쉬운 마음에 동네 친구를 불러 어묵에 소주 한잔을 나눈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겨울은 그저 춥고 귀찮은 계절이라고 하지만 나는 지금 이 추운 겨울이 고맙다. 여름은 여름 답고 겨울은 겨울 답다는거 이게 고마울 줄이야, 겨울은 우리에게 멈춤과 쉼의 시간을 준다. 그리고 그 속에서 작은 것들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게 한다.
겨울이 없다면, 우리는 봄을 온전히 반길 수 없을 것이다. 겨울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따뜻함의 소중함을 알게 되고, 서로의 온기를 나눌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겨울을 살아간다. 겨울을 겨울답게, 그 안에서 일상의 행복을 하나씩 발견하며.
그러니 내일 다시 날이 추워진다고 해도 괜찮다. 목도리를 한 번 더 돌려 매고, 주머니 속에 손을 깊숙이 넣은 채 느릿느릿 걷자. 차가운 바람이 불어와도, 그 안에는 어딘가 작고 소중한 행복이 숨어 있을 것이다.
글을 쓰고 있는 한 밤, 베란다 오피스는 제법 춥다.